두산은 은행으로, 빈그룹은 한국으로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7월, 4625억 원 규모의 외화채 만기를 맞았습니다. 3년 전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빌린 돈을 갚을 시점이 됐을 때, 이 회사는 같은 방식으로 차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은행 대출을 택했습니다. 그사이 시장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이 예외가 아닙니다. 글로벌 금리 상승이 가팔라지면서, 자금을 어디서 어떻게 빌리느냐는 질문의 답이 기업마다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 하반기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3억 달러를 조달할 계획이었습니다. 금융기관의 보증을 확보했고 주관사단도 꾸렸습니다. 그런데 채권을 발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계획의 외형은 갖췄지만 실제 실행은 멈춘 것입니다. 대신 은행 대출로 기존 외화채 만기를 막았습니다. 이미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도 은행을 선택했다는 점이 현재 글로벌 채권시장의 비용 부담을 보여줍니다.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글로벌 채권시장을 주로 쓰던 외국 기업들이 국내 채권시장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제지 회사 APP그룹은 올해 3월 국내에서 8500만 달러를 조달했습니다. 베트남 빈그룹은 현지 제조업체로는 이례적으로 원화 채권 발행을 추진 중입니다. 메타 등 빅테크도 국내외 증권사에 원화채 발행 가능 여부를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채권시장과 인연이 없던 기업들이 동시에 몰려드는 흐름입니다.
이 두 가지 움직임—국내 대기업의 이탈과 외국 기업의 진입—을 동시에 설명하는 배경은 글로벌 금리 상승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매파적 통화정책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달러를 직접 조달하는 비용이 늘었습니다. IB 업계에 따르면 대기업이라도 금융사 보증 없이는 5%대 금리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자금이 급한 글로벌 대기업 입장에서는 신흥국 채권시장에도 발을 걸치는 것이 비용을 분산하는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채권시장이 그 선택지 중 하나로 들어온 것입니다.
국내 대기업 모두가 글로벌 채권시장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롯데렌탈과 한화솔루션의 미국 법인 한화큐셀아메리카홀딩스는 현재 달러 조달을 추진 중입니다. 사업 운영이나 현지 투자에 외화가 직접 필요한 경우, 비용 부담을 알면서도 달러를 선택합니다. IB 업계 관계자는 "비용 부담보다 사업 자금 조달 등 이해관계를 우선시해 외화채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비용과 필요 사이의 판단이 기업마다 다른 것입니다.
같은 IB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라도 금융사 보증 없이는 5%대 금리를 감수해야 하기에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말했습니다. 금융사 보증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조달 비용이 크게 갈립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증까지 확보했고도 발행을 멈춘 것은, 보증이 있어도 현재 금리 수준이 부담스럽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기업이 어디서 돈을 빌리는지는 현재 글로벌 금리 수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보증을 갖춘 대기업조차 글로벌 채권 발행을 포기하고 은행 대출을 택했다는 것은, 5%대 달러 조달 비용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입니다. 이 흐름이 이어진다면, 향후 외화채 발행을 추진하는 국내 기업들의 이자비용은 계속 높아질 수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증까지 준비하고도 발행을 멈춘 장면이, 지금 시장의 온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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