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조 공장, 짓고 나서 못 돌릴 수 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800조 원이 투입됩니다. 삼성전자 최대 노조는 이미 그 공장 신설을 2027년 교섭 의제로 올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공장을 짓는 것과 공장을 돌리는 것이 서로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발단은 올해 3월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입니다. 이 법이 만든 해석의 틈 하나가 대규모 투자 계획 전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최대 노조인 초기업노조는 호남 신공장 건설을 2027년 단체교섭 의제로 다루겠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쟁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근거는 올해 3월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입니다. 개정법은 쟁의 대상에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의 결정'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이 조항이 신규 투자에 따른 인력 전환 배치까지 쟁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열었습니다.
개정 전 노동조합법은 쟁의 대상을 임금·근로시간·복지 등 근로조건으로 제한했습니다. 신규 공장 설립이나 인력 배치는 경영 판단 영역이어서 교섭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3월 개정으로 '경영상의 결정'이 쟁의 대상에 들어오면서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기존 시행지침은 배치 전환의 쟁의 대상을 '구조조정에 따른 배치 전환'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사 양측의 해석이 엇갈리면서 분쟁 조짐이 가시화됐고, 노동부가 직접 지침 보완에 나서게 됐습니다.
반도체 공장은 지어 놓는다고 바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 공장에는 기존 공장의 숙련 엔지니어를 전환 배치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공정을 이해하고 장비를 다뤄본 인력이 초기 가동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노조의 반대에 부딪히면 껍데기만 짓고 가동은 못 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계가 "노조에 사실상 투자 거부권을 쥐여주는 격"이라고 반발하는 이유입니다.
노동부는 다음 달 초 쟁의 대상 범위를 구체화한 시행지침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당초 시행령 개정도 검토했지만, 법률의 위임 근거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기존 해석지침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습니다. 재계는 '신규 투자·증설에 따른 인력 배치는 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지침에 명문화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침은 법률이 아닙니다. 법 조항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해석 분쟁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습니다.
산업화를 먼저 경험한 주요국은 경영 판단과 노동 교섭의 경계를 법으로 명확히 정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사업 재편 같은 경영 판단에는 협상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영국은 쟁의 주제를 임금 등 고용조건과 채용·해고로 제한합니다. 일본과 독일도 설비투자는 경영 전권 사항으로 봅니다. 투자 결정과 인력 이동은 기업이 결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 조건만 협상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입니다. 한국은 이 경계가 법 개정으로 흐려진 상태입니다.
지침이 나와도 법 조항은 바뀌지 않습니다.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이 쟁의 대상에 포함돼 있는 한, 해석 분쟁은 개별 사업장마다 반복될 수 있습니다. 노동부는 31일 노사 단체와 면담해 보완안을 공유합니다. 800조 원 규모의 공장이 실제로 가동되려면, 그 공장에 배치될 엔지니어의 이동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가 먼저 정리돼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