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레인지와 수술로봇이 같은 날 관세표에서 내려왔습니다 🔬 전자레인지, 전동면도기, 커피 메이커. 그리고 MRI, 수술로봇, 위스키, 치즈.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 물건들이 같은 문서에 올랐습니다. 백악관이 공개한 관세 인하 대상 1,696개 품목입니다. 미국이 내리는 소비재 77개, 중국이 내리는 의료기기·농축수산물 1,619개. 앞의 77개는 여러분이 마트에서 집어 드는 물건이고, 뒤의 1,619개는 미국 농장에서 배에 실리는 물건입니다.
◾ 각각 300억 달러, 합치면 600억 달러
미국과 중국은 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각각 300억 달러 규모 상품의 관세를 낮추기로 했습니다. 지난 5월 합의분까지 더하면 600억 달러 규모입니다. 지난해 양국 교역액 4,150억 달러의 약 14.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백악관은 인하 품목 전체의 90%가 최혜국대우 세율 수준까지 내려간다고 설명했습니다. 최혜국대우 세율은 세계무역기구 협정에 따라 회원국끼리 적용하는 가장 낮은 기본 관세율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 대우가 아니라, 원래 붙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 무역위원회를 분기마다 연다
이번 합의에는 관세 숫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 대표,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미중 무역위원회 수석 대표를 맡아 분기당 한 번 이상 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일회성 발표로 끝내지 않고 정기 협의 채널을 만든 셈입니다. 다만 합의 내용에도 온도차가 있습니다. 중국 상무부는 미국산 석탄 관세도 인하 대상에 넣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백악관이 언급한 1,000만 톤 이상의 석탄 수입 약속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 11월 3일이 걸려 있다
양국 모두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디젤 가격 급등으로 흔들리는 농어민 지지층을 다독이고, 물가 부담에 지친 소비자의 불만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관세를 내린 77개 소비재가 장난감, 보온병, 유아용 카시트인 이유입니다. 중국은 내수 부진과 실업률 상승에 시달리는 가운데, 주력 수출품인 경공업 제품의 미국 판로를 다시 열게 됐습니다. 서로 필요한 것을 맞바꾼 구조입니다.
◾ 목표는 170억 달러, 실적은 39억 달러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조치가 2028년까지 매년 170억 달러 이상의 미국산 농산물을 사겠다는 중국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1~7월 중국의 대두 제외 미국산 농산물 수입은 39억 달러에 그쳤습니다. 7개월 실적이 연간 목표의 4분의 1에도 못 미칩니다. 관세를 내려도 사줄 여력이 따라오는지는 별개 문제라는 뜻입니다.
◾ 같은 주에 움직인 다른 변수들
같은 시기 일본은행은 10월 회의에서 2회 연속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9월 18일 기준금리를 1.25%로 올려 31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한 직후입니다. 몬마 가즈오 전 일본은행 이사는 25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10월 연속 인상 가능성을 20~30%로 봤고, 내년 6~7월 최종 금리 약 2%까지 0.25%포인트씩 세 차례 더 오를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미 연준도 같은 달 금리를 0.25%포인트 올려 4.00%로 높였습니다. 엔화는 인상 직후 오히려 달러당 158엔대로 밀렸다가 28일 157.43엔에 거래됐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일 정상회담에서 엔화 약세로 미국 무역이 어렵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 점유율 95%에서 0%로 떨어진 회사
반도체 쪽도 움직였습니다. 디인포메이션은 27일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공업정보화부가 바이트댄스와 알리바바 등에 엔비디아 RTX 프로 5500 구매 승인 방침을 알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칩은 워크스테이션용으로, 서버용 AI 가속기와 달리 HBM 대신 GDDR7 메모리를 씁니다. HBM은 AI 가속기에 주로 쓰이는 고성능 메모리입니다. 다만 한 서버에 8개를 묶으면 대형 AI 모델을 돌릴 수 있습니다. 바이트댄스는 약 100만 개 주문을 검토 중이고, 엔비디아는 12월 말부터 분기당 약 50만 개를 공급할 계획입니다. 중국 판매가는 8만 5,000~9만 위안입니다. 젠슨 황 CEO는 중국 시장 점유율이 한때 95%에서 사실상 0%로 떨어졌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다만 그리어 USTR 대표는 미중 협상에서 반도체 수출 통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고 밝혀, 미국의 승인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 한 가지만 기억한다면
이번 관세 인하로 값이 내려갈 수 있는 품목은 미국 소비자가 사는 중국산 소형 가전과 장난감, 그리고 중국 병원이 사는 미국산 의료기기·미국산 농축수산물입니다. 한국 소비자에게 직접 값이 내려가는 품목은 아닙니다. 다만 엔화가 157엔대에 머무는 동안 일본은행이 10월에 또 올릴지, 중국의 미국산 농산물 구매가 39억 달러에서 실제로 늘어나는지는 원화 환율과 곡물 가격을 통해 국내에도 전해집니다. 11월 3일 미국 중간선거 전까지가 이 합의의 유효 기간처럼 관리될 가능성도 함께 봐야 합니다. 전자레인지와 수술로봇이 같은 문서에 오른 이유는 무역 논리가 아니라 선거 일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