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은 최근 삼성전자에 약 20조 원, SK하이닉스에 약 5조 원의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임의로 정한 금액이 아닙니다. 두 회사가 지난해 실제로 낸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각각 약 5년 치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한전의 계획은 이 돈을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에 우선 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도체 공장이 몰려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그리고 앞으로 대규모 전력 수요가 예상되는 지역의 송·변전망 투자를 앞당기겠다는 구상입니다. 송·변전망은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공장까지 실어 보내는 설비를 말합니다. 공장은 다 지어 놓고 전기를 끌어올 길이 없으면 가동이 어렵습니다.
한전이 남의 돈을 빌리기 어려운 사정도 있습니다. 2026년 6월 말 기준 한전의 총부채는 210조 7,000억 원입니다. 하루에 나가는 이자만 약 115억 원 수준입니다. 여기에 시한도 걸려 있습니다. 한전이 발행할 수 있는 회사채 한도를 기존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에서 최대 5배까지 늘려준 정부 특례가 있는데, 이 조치가 내년 말 종료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전력망 투자 재원의 상당 부분을 회사채로 조달해 왔던 방식이 앞으로는 좁아진다는 뜻입니다. 선납금 25조 원은 그 빈자리를 메울 카드였습니다.
한전도 그냥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업의 자금 부담을 낮추기 위한 조건을 함께 제시했습니다. 선납금에 국고채 2년물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적용하고, 이후 반기마다 납부할 전기요금에서 원금과 이자를 차감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구조를 뒤집어 보면 보입니다. 반도체 기업이 한전에 장기 자금을 빌려주고, 그 돈을 이자까지 붙여 전기요금으로 되돌려 받는 형태입니다. 국고채 2년물 금리는 정부가 2년 만기로 돈을 빌릴 때 붙는 금리로, 시장에서 가장 안전한 축에 속하는 기준입니다. 그보다 높은 이자를 주겠다는 제안이었던 셈입니다.
최근 메모리 업황이 좋아지면서 두 회사의 실적과 현금창출력은 크게 개선됐습니다. 돈이 없어서 거절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두 회사는 전력 인프라를 앞당겨 확충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5년 치 비용을 한꺼번에 집행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반도체는 업황 변동성이 큰 산업입니다. 지금의 호황이 앞으로 5년간 계속된다고 전제하고 수십조 원을 미리 집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두 회사 모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동시에 굴려야 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선납금을 확보할 경우 추가 회사채 발행을 줄이면서 전력망 건설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양사의 거절로 새로운 재원 조달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밝혔습니다. 한전 입장에서는 재원 조달과 전력망 건설 일정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기업 입장 에서는 전력망은 필요하지만 그 건설비를 선지급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같은 목표를 두고 부담을 누가, 언제 지느냐에서 갈렸습니다.
이번 거절로 사라진 것은 25조 원이 아니라, 전력망 투자를 앞당길 재원 한 가지 입니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두 개로 좁혀집니다. 첫째, 내년 말 종료 예정인 한전채 발행 특례가 연장되는지 여부입니다. 둘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포함한 송·변전망 투자 일정이 기존 계획대로 유지되는지입니다. 전기요금 인상 여부는 아직 이 기사에서 언급된 사안이 아닙니다. 다만 210조 7,000억 원의 부채와 하루 115억 원의 이자를 안고 있는 회사가 어디서 돈을 구하는지는, 전기를 쓰는 모든 곳과 연결된 문제입니다. 5년 치를 미리 달라는 제안이 나왔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