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경쟁력은 혁신 기술을 빠르게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고객과 파트너, 스타트업이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태계 역량에서 나온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 사장이 실리콘밸리에서 글로벌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 관계자들 앞에 서서 한 말입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가 투자 대상으로 꺼낸 목록에는 데이터센터 소프트웨어와 광(光) 연결 기술이 들어 있었습니다. 반도체 회사의 투자 지도가 칩 바깥으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18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17일(현지 시간) 첫 'SK하이닉스 벤처스 데이'를 열고 향후 투자 전략을 공개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업형 벤처캐피털 브랜드 'SK하이닉스 벤처스'를 출범시켰습니다. 기업형 벤처캐피털은 일반 기업이 전략적 목적으로 운영하는 벤처투자 조직을 말합니다. 행사에는 곽노정 사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과 글로벌 벤처캐피털,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새로 시작한 활동은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미주법인(SKHYA)을 통해 2015년부터 기업형 벤처캐피털 조직을 운영해왔습니다. 미국과 중국, 이스라엘, 일본 등의 반도체·미래 기술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벤처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회사 설명에 따르면 현재까지의 투자 수익은 누적 투자액의 2배를 넘어섰습니다. 11년간 이름 없이 굴려온 조직에 이번에 브랜드를 붙인 셈입니다.
투자 분야는 네 갈래로 공개됐습니다. AI 컴퓨팅, 데이터센터,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광인터커넥트입니다. 광인터커넥트는 빛 신호로 데이터센터 안의 칩과 서버를 연결해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기술입니다. 회사가 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AI 모델이 고도화되면서 컴퓨팅 성능과 메모리 용량 요구가 빠르게 커지고 있고, 데이터센터의 전력 효율 중요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모리 하나만 잘 만들어서는 대응이 어려운 조건입니다.
누적 투자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지만, SK하이닉스가 강조한 것은 수익률이 아니었습니다. 포트폴리오 기업과 장비를 공동 개발하거나 개념검증을 진행하며 새로운 공급망과 고객을 발굴한 사례를 성과로 제시했습니다. 개념검증은 신기술이 실제로 쓸 만한지 소규모로 미리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기존 활동이 미래 기술 흐름을 읽고 신사업 기회를 찾는 데 초점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AI 생태계 안에서 기술·사업 협력을 넓히는 전략적 투자 기능을 강화한다는 방향입니다.
행사에는 미국의 AI 컴퓨팅·데이터센터 분야 스타트업들도 참여했습니다. 차세대 AI 모델에 대응하기 위한 컴퓨팅과 메모리, 시스템 소프트웨어 혁신 방안이 논의됐습니다. AI 데이터센터의 성능과 전력 효율을 함께 끌어올리기 위한 광 기반 시스템 기술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습니다. 곽 사장은 "SK하이닉스 벤처스를 통해 유망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전략적 투자와 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AI 인프라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글로벌 파트너로 성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발표의 실질은 '투자 대상 목록이 공개됐다'는 점입니다. AI 컴퓨팅, 데이터센터, 시스템 소프트웨어, 광인터커넥트. 이 네 분야에 몸을 담고 있다면 국내 메모리 기업의 접점이 어디에 열려 있는지가 문서화된 것입니다. 투자 방식도 직접 투자와 벤처펀드 출자 두 가지가 병행돼왔고, 장비 공동 개발과 개념검증 같은 협력이 함께 따라붙습니다. 곽 사장이 실리콘밸리에서 꺼낸 단어는 '기술'이 아니라 '생태계'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