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계좌에는 반드시 채워야 하는 칸이 있습니다. 확정기여형과 개인형퇴직연금은 전체 자산의 30%를 안전자산으로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칸을 채우면서 주식 비중을 오히려 늘리는 방법이 쓰이고 있습니다. 주식과 채권을 절반씩 섞은 상장지수펀드를 안전자산 칸에 넣는 방식입니다. 이 상품군에 지금 20조 원이 모여 있습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7일 기준 국내 채권혼합형 ETF의 순자산 총액은 약 20조 원입니다. 채권혼합형 ETF는 주식과 채권을 정해진 비율로 함께 담아 거래소에 상장한 펀드입니다. 퇴직연금 감독규정에서는 이 상품을 안전자산으로 분류합니다. 개별 상품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한국투자신탁운용의 'ACE 미국S&P500미국채혼합50액티브'입니다. 18일 에프엔가이드 집계에 따르면 이 상품의 순자산은 전날 기준 1조 2,417억 원입니다. 국내 S&P500 채권혼합형 ETF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지난해 말 국내 채권혼합형 ETF 순자산 총액은 8조 원대였습니다. 9개월 만에 약 2.5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퇴직연금 계좌에서 ETF를 직접 골라 담는 투자자가 늘어난 결과로 풀이됩니다. 앞서 언급한 상품은 2022년 8월에 상장했습니다. 17일 기준 최근 3년 수익률은 37.41%입니다. 올해 들어서만 5,149억 원이 순유입됐습니다.
현행 퇴직연금 감독규정상 확정기여형과 개인형퇴직연금은 포트폴리오의 최소 30%를 안전자산으로 채워야 합니다. 나머지 70%까지만 주식형 상품 같은 위험자산에 넣을 수 있습니다. 주식과 채권을 5대 5로 담은 혼합형 ETF는 규정상 안전자산에 해당합니다. 위험자산 한도 70%를 주식형 ETF로 채우고, 안전자산 30%를 이 상품으로 채우면 안전자산 칸의 절반인 15%도 사실상 주식에 들어갑니다. 전체 포트폴리오의 실질 주식 비중이 최대 85%까지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이 계산은 뒤집어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규정상 안전자산으로 분류되지만, 담긴 자산의 절반은 미국 대표 주식입니다. 분류상의 안전자산이 원금 보장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운용 방식도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식은 ETF운용부가 S&P500 종목을 구성해 지수와의 차이를 관리합니다. 채권은 해외채권운용부서가 미국 국채와 우량 기관 달러채를 종목 단위로 골라 담습니다. 분배금은 연 1회만 지급합니다. 현금이 자주 빠져나갈 때 발생하는 과세를 줄이고 재투자로 불어나는 효과를 남겨두기 위한 선택이라고 운용사는 설명합니다.
남용수 한국투자신탁운용 ETF본부장은 "상장 후 약 4년간 급등락기를 거치면서도 40%에 가까운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운용 규모가 클수록 고정비 절감으로 투자자 부담이 줄고 풍부한 거래대금이 유동성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는 상품을 운용하는 회사 측의 설명입니다. 과거 수익률이 앞으로의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내 퇴직연금 계좌에서 안전자산 30% 칸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원리금보장형 예금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 30%는 주식과 무관합니다. 채권혼합형 ETF로 채워져 있다면 그 절반이 주식에 노출돼 있습니다. 같은 30%지만 실질 위험은 다릅니다. 30%를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규정은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 칸을 무엇으로 채우는지에 대한 선택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