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메모리 시장이 누가 더 빠르게 달리는지를 겨루는 '직선도로'였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변하는 '곡선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8일 경기 이천캠퍼스에서 열린 '2026 SK하이닉스 미래포럼'에서 한 말입니다. 더 빠르고 성능 좋은 메모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날 회사가 가장 구체적으로 내놓은 답은 제품이 아니라 공장이었습니다.
8일 SK하이닉스가 이천캠퍼스 미래포럼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회사는 AI가 반도체 생산라인의 이상 징후를 분석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팹(Fab)은 반도체를 실제로 만드는 생산 공장을 말합니다.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AI가 관련 데이터를 먼저 분석해 원인과 대응 방안을 제시하고, 엔지니어가 이를 검증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판단의 마지막 단계는 여전히 사람에게 남겨두는 구조입니다.
바뀌는 것은 분석 도구만이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표준업무절차(SOP)를 다시 설계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AI가 함께 일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업무 절차 자체를 손보는 것입니다. 공정과 설비에서 나오는 데이터도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데이터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미리 정의해, AI가 생산 현장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순서를 보면 AI 도입이 먼저가 아니라, 절차와 데이터 정비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계획 단계에만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SK하이닉스는 자체 AI 플랫폼 '가이아(GaiA)'를 활용해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고, 가이아를 통해 팹 내 생산 운영까지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조 현장에는 안전 감독 로봇이 투입됐습니다. 사람이 올라가야 하는 고소 작업에는 비전언어모델을 적용한 드론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비전언어모델은 화면에 보이는 장면과 언어를 함께 이해하는 AI 기술입니다.
이날 포럼에서 앤트로픽의 타리크 시히파르 제품총괄은 반도체 산업의 '소프트웨어 공장' 구상을 소개했습니다. 회로 시뮬레이션, 전력 측정, 시스템 최적화처럼 반복적이고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업무를 AI에 맡기는 방식입니다. AI가 결과를 스스로 검증하게 하고, 사람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재욱 SK하이닉스 부사장은 "AI는 협업 대상이자 또 다른 구성원"이라며, 사람이 반복적인 분석 업무에서 벗어나는 환경을 제시했습니다.
메모리 전략도 함께 바뀝니다. AI가 단순 질의응답을 넘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장시간 작업하는 '에이전틱 AI'로 진화하면서, 저장하고 불러와야 할 데이터의 종류와 양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SK하이닉스가 내놓은 답은 '풀 스택 AI 메모리' 전략입니다. 3D 적층 D램과 HBM, HBF 등 여러 메모리를 AI 작업 특성에 따라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가 오가는 폭을 크게 넓힌 메모리입니다. AI 소프트웨어와 가속기 업체와 시스템 단계부터 함께 설계하는 것도 핵심입니다. 임의철 SK하이닉스 부사장은 회사가 단순 메모리 공급업체를 넘어 '풀 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로 진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HBM 다음을 겨냥한 3D 메모리 기술 방향도 제시했습니다. 3D 기술을 '소자 집적'과 '이종 집적'으로 구분하고, 데이터가 오가는 통로를 넓히는 데이터 버스 폭 확대와 초단거리 전송을 주요 방향으로 꼽았습니다. D램 주변회로에 로직 파운드리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내놨습니다. 다만 남은 과제도 회사 스스로 밝혔습니다. 김경훈 담당부사장은 "3D 적층 D램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려면 설계 최적화뿐 아니라 발열과 공정 난도 등 기존과 다른 기술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손호영 담당부사장은 "3D 기술은 팹과 패키징의 기술 경계까지 바꾸고 있다"며 전공정과 후공정,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공동 최적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메모리 회사가 내놓은 전략의 무게가 '칩 성능'에서 '시스템 설계'와 '공장 운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SK하이닉스 관련 발표를 볼 때, 속도와 용량 수치만이 아니라 어떤 AI 업체와 시스템 단계에서 함께 설계했는지, 3D 적층의 발열과 공정 난도 과제를 어디까지 풀었는지를 함께 보면 흐름이 읽힙니다. 곽 사장은 "관점을 '밖에서 안으로(Outside-in)' 전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고객과 파트너의 시선에서 다시 보자는 것입니다. 곡선도로에서는 속도계만 봐서는 방향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