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동안 비어 있지 않았지만, 사실상 비어 있던 자리였습니다. 임기가 끝난 사람이 자리를 지키며 후임을 기다렸습니다. 국민연금이 굴리는 돈은 1866조 원입니다. 그 돈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가 14일 채워졌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은 14일 기금을 관리·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장에 이규홍 전 사학연금 자금운용관리단장을 선임했다고 밝혔습니다. 기금운용본부장은 흔히 CIO로 불리는 자리입니다. 임기는 15일부터 2년이고, 직무수행실적에 따라 1년 연임이 가능합니다. 이 자리가 다루는 기금 규모는 1866조 원입니다. 같은 날 서원주 전 CIO는 임기를 마쳤습니다. 서 전 CIO는 3년 임기를 모두 채웠지만, 후임 인선이 늦어지면서 9개월을 더 근무했습니다.
이 신임 CIO의 이력에서 시장이 먼저 본 것은 사학연금 시절 숫자입니다. 그가 사학연금에 합류한 것은 2019년 10월입니다. 그 직전인 2018년 사학연금 수익률은 -2.39%였습니다. 이후 2019년 11.15%, 2020년 11.49%, 2021년 11.95%로 세 해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했습니다. 2021년에는 운용 수익 2조 4738억 원을 올렸는데, 당시 기준 공단 창립 이후 최대 실적이었습니다. 다만 이 기간은 글로벌 증시가 전반적으로 상승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숫자 자체는 원문 그대로이고, 성과의 배분은 별개 문제입니다.
1966년생인 이 신임 CIO는 삼성자산운용, DB자산운용,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현 카디안자산운용)을 거쳤습니다. 이후 NH아문디자산운용 CIO와 아쎈다스자산운용 대표이사를 지낸 뒤 사학연금 CIO를 맡았습니다. 부동산 전문 운용사에서 장기 자산배분, 대체투자, 위험관리까지 폭이 넓습니다. 특정 자산군에 치우치지 않은 경력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꼽힙니다. 국민연금 CIO 자리가 주식 하나, 부동산 하나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내 주식과 해외 투자, 사모펀드 출자가 한 책상 위에 올라옵니다.
새 CIO가 받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미결 과제입니다. 첫째는 국내 주식 리밸런싱입니다. 리밸런싱은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한 자산별 비중 한도를 넘으면 그 자산을 팔아 목표치로 되돌리는 작업입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증시가 급등하자 정부는 이 조정을 유예했습니다. 한도를 넘겨도 팔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7월 증시 변동성으로 우려는 다소 줄었지만, 비중을 어디에 둘지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둘째는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 출자입니다. 홈플러스 문제로 2년간 중단된 상태이고, 재개 여부가 과제로 거론됩니다.
세 번째 과제는 구조가 더 까다롭습니다.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할 때 외화 채권을 발행해 투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원화를 외화로 바꾸는 규모가 커서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마련된 방안입니다. 다만 채권을 발행하면 국민연금의 부채가 늘고, 신용 등급 평가 문제도 따라옵니다. 외환시장 안정과 부채 증가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이 신임 CIO가 통합 포트폴리오, 이른바 TPA 도입에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산을 주식·채권으로 나누는 대신 위험과 수익 특성을 기준으로 묶어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투자은행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기금 규모는 지난해 말 대비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 주식 문제, 외화채 발행, 환 헤지 등 운용 환경이 결코 녹록지 않은 상황"이라며 "이런 가운데 다양한 자산군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이 신임 CIO가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적임자라는 평가와, 환경이 어렵다는 진단이 같은 문장에 들어 있습니다. 기금이 커진다는 것은 굴릴 돈이 늘었다는 뜻이면서, 움직일 때마다 시장이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국민연금의 자산 비중은 CIO 한 사람이 정하지 않습니다. 국내 주식을 얼마나 담을지, 해외 투자를 어떻게 할지는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합니다. 이번 인사로 바뀌는 것은 그 결정을 실행하는 방식입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 현황과 자산별 비중, 기금운용위원회 의결 내용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홈페이지에서 정기적으로 공개됩니다. 9개월을 기다려 채운 자리인 만큼, 앞으로 2년간 리밸런싱 재개 여부와 사모펀드 출자 재개 여부가 가장 먼저 드러날 신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