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 투자, 혼자 다 내야 한다 SK하이닉스가 호남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지으려면 400조 원 규모의 투자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정부가 청사진을 제시한 대형 프로젝트인데, 외부 투자자와 나눠 낼 길은 사실상 막혀 있습니다. 회사의 사업성이나 신용도 때문이 아닙니다. SK하이닉스가 그룹 지배구조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이유입니다.
16일 공정거래법 규정에 따르면, 일반 지주회사 산하의 손자회사는 국내 증손회사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합니다. SK하이닉스는 지주회사 SK㈜의 손자회사입니다. 호남 팹을 위해 별도 법인을 세우면 그 법인은 증손회사가 되고, SK하이닉스가 지분을 전부 들고 있어야 합니다. 지분을 한 조각도 넘길 수 없으니, 그 법인에 외부 자금을 받아올 방법도 없습니다. 400조 원을 단독으로 조달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같은 그룹 안에서도 사정은 달랐습니다. SK㈜의 자회사인 SK텔레콤은 AI 데이터센터 사업을 위해 별도 법인 SK호라이즌을 세운 뒤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IMM인베스트먼트·스톤브릿지캐피털 컨소시엄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3조 원 이상을 확보했습니다. SK㈜ 역시 신재생에너지 통합 법인을 만들며 KKR과 지분을 나눴습니다. 최근 국내 기업들이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대 재원을 글로벌 자본과 함께 마련해 온 방식입니다. 이 길을 쓴 쪽은 자회사였고, 손자회사에는 지분 100% 규정이 걸립니다.
빠져나갈 통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인투자촉진법은 외국 법인이 지분 30% 이상을 보유하는 등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손자회사의 합작법인 설립을 허용합니다. 둘 이상의 주체가 지분을 나눠 함께 세우는 법인입니다. 다만 이마저도 동종 산업 내 기업이 아니면 공정거래위원회 승인을 받기 어렵습니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수익을 목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재무적투자자, 이를테면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는 이 조건에 들어맞기 어렵습니다. 수백조 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자금줄이 제도 단계에서 걸러지는 셈입니다.
규제를 풀자는 법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여당은 국가첨단전략산업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비수도권에 있는 첨단산업 공동 출자법인에 한해,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보유 요건을 현행 100%에서 50% 이상으로 낮추는 내용입니다. 절반만 보유하고 나머지는 외부 투자자에게 열어주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관련 논의는 더딘 상태입니다. AI발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산업계에서는 시간 자체를 변수로 봅니다.
남은 과제가 자본 조달 하나도 아닙니다. 첨단 팹과 초대형 데이터센터, 로보틱스 거점이 제때 돌아가려면 전력·용수 인프라 지원이 함께 가야 합니다. 자율주행 로봇과 휴머노이드의 현장 투입을 막는 안전 규제, 데이터 수집·활용 법제도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노사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사업장 신설 등 경영상 결정은 의무적 교섭·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지침안을 냈습니다. 다만 공장 신설로 근로조건 변화가 구체화되면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함께 제시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규모 투자와 인력 재배치를 현실적으로 분리하기 어렵다며, 결국 노동쟁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400조 원은 이미 집행이 확정된 금액이 아니라, 제도 조건이 갖춰져야 움직이는 계획입니다. 지켜볼 지점은 두 가지로 좁혀집니다. 하나는 국가첨단전략산업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 여부, 즉 증손회사 지분 요건이 50% 이상으로 내려가는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용노동부 지침안의 최종 확정 내용입니다. 지분 100% 규정이 그대로 남는다면 호남 팹의 자금 문제는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SK하이닉스가 400조 원을 혼자 마련하는 구조입니다.
![지주사 규제 묶여 자본 조달 발목…인력 재배치 땐 노동 쟁의도 암초 [시그널]](https://wimg.sedaily.com/news/cms/2026/09/16/news-p.v1.20260821.2190df788a6f42b1953d3d88ea99a75f_P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