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워싱턴에서 맺은 약속이 최종 계약으로 결실을 맺어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16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 호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미국 보잉·GE에어로스페이스 경영진과 나란히 선 자리에서 한 말입니다. 이날 서명된 계약의 총액은 448억 달러, 우리 돈 약 60조 원입니다. 항공기 한두 대를 사는 계약이 아닙니다. 석 달 뒤 출범할 통합 항공사가 앞으로 어떤 비행기로, 어디를 날지에 관한 설계도입니다.
16일 대한항공 발표에 따르면, 이날 체결된 계약은 두 건입니다. 첫째는 보잉과 맺은 362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의 차세대 항공기 103대 도입 계약입니다. 둘째는 GE에어로스페이스·CFM인터내셔널과 맺은 86억 달러 규모 계약으로, 항공기 예비 엔진 21대를 사고 항공기 28대에 대한 엔진 정비 서비스를 15년간 받는 내용입니다. 두 건을 합치면 448억 달러입니다. 비행기를 사는 돈과, 그 비행기를 15년간 돌보는 돈이 함께 묶인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갑작스러운 발표가 아닙니다. 조 회장은 지난해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보잉 등과 업무협약을 맺었습니다. 구속력 없는 약속 단계였습니다. 그 협약이 약 1년 만에 최종 계약서로 바뀐 것이 이번 발표입니다. 계약식에는 스테파니 포프 보잉 상용기 부문 사장 겸 최고경영자, 가엘 메외스트 CFM인터내셔널 사장 겸 최고경영자와 함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 등 양국 정부 관계자도 참석했습니다. 조 회장은 이 계약을 "단순한 기업 간 거래를 넘어 한미 양국의 굳건한 경제·기술 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신뢰의 이정표"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한 번에 103대를 주문했을까요. 대한항공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계속된 세계적인 항공기 공급 지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목적을 밝혔습니다. 주문해도 인도까지 오래 걸리니, 필요해질 시점을 역산해 미리 줄을 서는 구조입니다. 도입 기종을 보면 방향이 읽힙니다. 보잉의 차세대 장거리 대형 여객기 777-9가 20대, 787-10이 25대입니다. 통로가 2개 이상인 대형기로, 장거리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입니다. 여기에 중·단거리용 737-10이 50대, 화물기 777-8F가 8대 포함됐습니다. 장거리와 단거리, 여객과 화물을 한 번에 채운 주문입니다.
대한항공은 오는 12월 17일 아시아나항공과 통합해 새로 출범합니다. 현재 보유 기단은 166대이고, 합병 후에는 230여 대까지 늘어날 예정입니다. 대한항공은 통합으로 여객 공급이 기존 대비 55% 이상, 화물 공급이 1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다만 그 결과로 회사가 제시한 위치는 세계 기준 여객 15위권, 화물 5위권, 종합 10위권입니다. 기단이 40% 가까이 늘어도 여객 부문에서는 상위 10위권 밖이라는 뜻입니다. 승객 입장에서 더 체감되는 변화는 다른 쪽일 수 있습니다. 대한항공은 여객 사업에서 중복 노선을 정리하고 연결편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운항 스케줄을 최적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노선이 늘어나는 곳과 정리되는 곳이 동시에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대한항공이 제시한 통합 후 목표는 연간 매출 23조 원 수준이며, 매년 3,000억 원 수준의 시너지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확정된 실적이 아니라 회사의 기대치입니다.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는 수익성이 높은 미주발 항공편 판매 확대를 꼽았습니다. 화물에서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의 하부 화물칸 수송 역량을 흡수하고, 기존 화물 전용기는 단가가 높은 지역 운항에 집중시키겠다는 방침입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차세대 항공기 도입과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미래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억할 날짜는 12월 17일입니다. 이날부터 두 항공사는 하나의 항공사로 운항합니다. 통합 이후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도시는 약 120곳에 달합니다. 대한항공은 계약 발표 전날에도 국토교통부로부터 인천~울란바타르 연중 운수권 주 2회를 확보했습니다. 12월 17일 이후 일정으로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다면, 중복 노선 정리와 스케줄 조정 방침이 예고된 상태라는 점을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편명이나 시간이 바뀔 여지가 있는 구간이라면 발권 전후로 일정을 다시 확인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9월 16일 호텔 연회장에서 서명된 60조 원은, 몇 년 뒤 승객이 탑승구에서 마주할 비행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